사업, 산업부터 잘 선택하라
나는 단호하게 산업부터 잘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마차 운전사가 자동차 시대에 사라진것처럼, 코로나 특수로 많은 택시기사가 배달기사로 전업한 것처럼, 큰 시대의 흐름을 단일 회사나 몇 명의 인재가 바꿀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 흐름을 선택하고 올라탈 수 있을 뿐이다.
커피 산업을 선택했던 이유
별다른 재능없이 젊음과 패기로 뛰어들었던 첫 창업에서 쓴맛을 봤던 나는 그 후에도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다가 어느날 브라운백을 시작하게 되었다.
창업이 5번째쯤 되자,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많이 커졌다.
특히 커피 산업에서 시작하겠다고하자 눈에 띄게 질문이 늘어났다. ‘왜 오래된 영역에서 하는지,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것은 알고 있는지, 이미 많은 기득권자들이 가득한데 뭘 바꿀수 있을지’ 등의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브라운백이 커피 산업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1) 커피 산업은 매우 큰 시장이다.
커피는 초당(!!) 3만잔이 소비되는 엄청난 규모의 재화이다. 그렇지만 측정되지도, 개선되지도 않고 과거의 경험이 답습되고 있다. 이 거대하고 오래된 산업은 디지털도, 구독도, 커머스도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구독을 했던게 아니라 원두 영역을 바꾸며 산업을 오래 관찰하다가 기회를 발견했고, 그 때 제대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는 회사가 우리밖에 없었던게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 운은 이 거대한 산업의 크기가 제공했다. 커피 산업의 크기는 우리나라 버거 시장과 주류 시장 전체를 합친것 보다 크고, 우리나라 사람은 하루에 미국과 일본 대비 절반정도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2) 투입되는 자원에 비해 최종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디지털이 결합된다면 이 최종 가치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브라운백 초기에는 도메인 역량이 부족해서 못하던 영역이 시간이 지나며 가능하게 되었고, 커피와 새로운 가치의 결합, 식품과 구독과 디지털의 결합이 형성되자 공헌이익률이 매우 높은 BM이 만들어지면서 고객에게도 기존 대비 1/10 ~ 1/9 정도의 낮은 가격에 카페 수준의 커피를 제공할 수 있었다.
기존 고객의 전환은 이 정도의 효용을 제공할때 더 빠르게 이루어졌다.
3) 경쟁자의 무기가 과거 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이 산업은 도메인의 특성상 허들이 높은 편이고, 스타트업이 뛰어들어서 잘하기도, 대기업이 과거의 관행을 바꾸기도 어려워서 디커플링하기 딱 좋았다.
우리는 커머스로 판매해서 고객의 취향을 데이터로 분석했고, 구독 계약 전체 과정을 모델링해서 고객을 어떻게 하면 잘 모을지, 어떻게 고객을 잘 대할지를 엄청난 실험을 통해 다듬었다. 시도의 한계비용이 낮은 디지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산업을 잘 선택해야한다는 생각은 브라운백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더욱 커졌는데, 주변에서 어떤 산업을 선택해야할지 물어보실때면 다음과 같이 조금 표준화해서 말씀드린다.
산업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위한 조언
A. 시장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큰 시장의 큰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반면 크기가 작은 산업에서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없어서 업종 자체를 바꿔야 다음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잘 되어도 한계가 뚜렷하므로 불안한 본업을 두고 새로운 도전을 다시 해야하므로 구성원의 집중력도 분산되기 쉽습니다.
B. 가치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는 고객 가치가 크고 지속가능해야 합니다.
높은 부가가치의 사업모델을 만들 수 있는 산업이어야 합니다. 무료 서비스로 고객을 모아서 트래픽을 레버리지로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사업모델은 굉장히 많은 검증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내외부의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가능하다면 무신사나 메일침프처럼 부트스트래핑(외부투자없이 생존할수 있는 사업모델의 스타트업)이 되면 더 좋습니다. 초기 가설에서도 그 다음 스케일업에서도 고객에게 직접 가치를 인정받을때까지 BM을 다듬고 다듬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노련한 구성원이 양성되고, 시장의 무형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BM이 부실하면 해당 사업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고갈되고, 외부의 소리에 휘둘리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희망고문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누구나 터치 몇 번에 가격비교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남들 모두 판매하고 있는 제품과 서비스로 사업을 하는 것은 다이소나 이마트를 지금 시작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C. 경쟁 강도는 낮을수록 좋고,
진입은 어려울수록 좋습니다.
경쟁강도는 질과 양으로 구분됩니다. 지금 주목받는 핫한 시장에서 천재들과 경쟁해야 한다면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이겨도 승자의 저주에 빠질 우려도 크고 그런 산업은 지금쯤이면 이미 기회의 시기가 지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거나, 어려운곳, 단순히 IT를 적용하는게 아니라 기존 도메인을 바탕으로 디지털을 접목하는곳이 훨씬 기회가 큽니다. 그곳의 기존 플레이어들은 구석기 시대 도구로 일을 잘하는 것에 숙련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 청동기나 철기를 들고 들어가야합니다. 신석기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내공이 깊고, 브랜드와 도메인 역량은 견고합니다.
기존 플레이어들은 과거의 숙련이 새로운 도구의 도입을 막을 것이므로 쉽게 따라하지 못하고, 고객들은 이미 혁신이 빠르게 적용된 다른 산업에서 청동기 쯤은 익숙하게 봤을 것이므로 환영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동기 도구를 통해 성공적으로 우리의 영역을 확보했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를 해당 산업에서 열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작은 성취를 완전히 갈아엎는, 산업 전체의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지만 성공한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높은 진입장벽을 형성합니다. 물론 그동안 우리는 다음 시대를 또 준비해야 합니다.
‘커피 산업을 디지털화하겠다’는 우리의 생각이 처음 브라운백을 시작하던 날부터 있진 않았다. 구독도 멤버들의 놀라운 고객 관찰력과 실행력으로 얻은 행운이었다. 우리가 도전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커피 산업의 거대한 크기,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지 않았던 오래된 역사, 숙련된 기존 플레이어들이었다.
만약 산업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아마 왜 가라앉는지도 모르고 수장됐던 타이타닉의 희생자들처럼 브라운백의 도전도 여기저기를 찔러보다 허망하게 스러져 갔을지도 모른다. 창업자는 특성상 희망과 비전에 가득차있다. 그것을 잃으면 미래를 만들 동력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에 취해 어디로 향해 발진할지를 좀 더 신중히 보지 않는다면, 그 소중한 열정과 시간을 다른 곳에 쓰게 된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지금 있는 산업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내년 봄에도, 다음해에도 살아남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