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날 새벽 3시에 있었던 일이다.
연휴 둘째날인 그날 응급구조사 A는 심야 근무중이었다.
한 노인이 119를 통해 신고해왔다.
민원의 내용은 아파서 꼼짝을 할 수 없으니 구조해달라는 것이었다.
한 노인이 119를 통해 신고해왔다.
민원의 내용은 아파서 꼼짝을 할 수 없으니 구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방서 내부에서도 고강도 업무 직군으로 통하며, 현장출동이 주요 업무지만 행정이나 대민지원등의 업무를 맡는 경우도 있다.
국세로 운영되는 119 구급대는 원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라 응급증상을 가진 경우에만 이용할수 있지만, 일단 누구든 신고하면 확인전에는 그 상황을 알기 어려우므로 통화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보다는 일단 출동해야한다.
국세로 운영되는 119 구급대는 원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라 응급증상을 가진 경우에만 이용할수 있지만, 일단 누구든 신고하면 확인전에는 그 상황을 알기 어려우므로 통화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보다는 일단 출동해야한다.
구급장비를 꾸려 현장에 도착한 A가 목격한것은 멀쩡한 상태의 노인이었다.
응급실로 옮겨달라는 노인에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어보자 그는 왼쪽 검지손가락을 가리키며 아프다고 했다.
그의 손과 몸에서는 소주 냄새가 가득했고, 빈 소주병들은 방안에 굴러다녔다.
초저녁부터 마신게 분명했다.
응급실로 옮겨달라는 노인에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어보자 그는 왼쪽 검지손가락을 가리키며 아프다고 했다.
그의 손과 몸에서는 소주 냄새가 가득했고, 빈 소주병들은 방안에 굴러다녔다.
초저녁부터 마신게 분명했다.
A는 지금 갈 수 있는 병원이 약 1.5시간 거리의 대학병원 응급실임을 설명했고, 노인은 다음날 일어나 인근 정형외과에 가면 훨씬 정확한 진단과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사실 이것은 사실 찰과상부터 골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사 상황에 훨씬 권장된다고 한다. 응급실은 정형외과 전문의가 아니라 응급의학과 전문의이기 때문이다.),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이동해서 접수후 약 3시간의 대기끝에 경미한 증상의 판단을 받고 퇴원했다. A는 여느 응급구조 사건처럼 병원으로 환자의 신변을 인계하고 다음 출동지로 임했다.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주변 사람답게 노인의 불감증, 국세의 올바른 운영, 안방 가구에 올라간 고양이 구조 신고가 점점 늘고 있다는 119구급센터 이용실태 등을 규탄했고, 급기야 응급구조사의 처우와 설날 가족과 보내지 못하고 특근해야하는 현실 등에까지 수다는 확대되었다.
그러던중 누군가 현장에서 그런 경우를 보면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A는 놀랍게도 노인의 경우가 전혀 자신의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며 다음처럼 이야기했다.
‘통증은 주관적입니다. 응급구조업무를 통해 현장에 출동해보면 사실 의료적 판단으로 보면 경미한 경우도 많이 만납니다. 하지만 그때그때 그것의 의료적 적합성을 판단하는것은 오히려 구급이라는 본질을 흐리게 됩니다. 그것은 병원에서 의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민원인의 기준과 현장 상황에 맞춰 구급구조한다는 업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차이를 알게되었다. 응급구조사는 사람을 판단하려 한게 아니라 현장에서 가용가능한 상황을 파악하고 업의 본질에 충실했지만, 방에서 무탈하게 노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비난한것이다. 얼마나 아파서 불편했는지는 사실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일인데 우리는 우리가 탈 구급차를 새치기 당한양 불평했다.
아이를 기른적 없는 청년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타인의 다른 상황에 공감하는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도 우정을 나눌수 있는것처럼, 상황이 다르더라도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다시 본질을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쉽게 공감이 어려울때면 타인의 주관을 존중하는것만으로도 의미를 더 할수 있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