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피니는 세계 최대의 면세점인 DFS(Duty Free Shoppers Group)를 1960년에 창업했다. 1960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79달러에 불과했던것을 보면 그의 선견지명, 식민지 국가의 한, 그 뒤 이어진 대한민국 경제의 고속성장, 해외 진출로 확장하는 국내 면세점의 확장 등 다양한 생각이 든다.
물론 척은 타고난 사업가였다. 그는 10대부터 대리점 체제를 고안하는 등의 사업적 재질을 보였고, 비싼 학비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부유한 동창들이 한적한 코넬대학교 캠퍼스에서 아쉬워했던 샌드위치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의 면세점 사업은 미국인의 소득 상승과 세계 여행 확장과 함께 그야말로 성장 일로였다. DFS는 1996년 LVMH에 인수되지만, 그는 이미 1988년에 포브스 기준 세계 부자 23위의 자산가였다.(약 1.5조원)
그런데 그의 DFS 매각 당시 사건이 터졌다. 58.75%를 가진 척 피니와 주주들은 매각을 추진했지만, 40.75%를 가진 다른 주주들은 이에 반대하면서 매각 반대 소송을 추진한 것이다. 이민자 출신의 아메리칸 드림이면서 거대 글로벌 기업이 된 회사의 매각 건이었으므로 당시 사건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개인적으로 ‘뉴욕 컨설팅 회사’로 회사를 세운지 불과 2년차이던 1984년 5억달러(에 해당하는 DFS 지분) 포함 15년동안 약 40억 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척 피니는 이제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교도소에 갈 듯만 했다.
척 피니는 그제서야 자신이 기부처에 내렸던 ‘이름이 밝혀지면 기부를 중단하겠다’던 엄포를 어쩔수 없이 거두었고, 그동안 그가 코넬대학교(약 8천억원), 스탠포드 대학(약 2천억원) 등 엄청난 크기의 기부를 한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척 피니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75세까지 대중교통만 타고 다니며, 읽을거리를 비닐봉지에 담아다녔다. 그는 10달러짜리 카시오 시계를 평생 차고 다녔고,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며, 잔액은 200만달러로 알려진 2016년이래 추가로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그는 결단력과 행동력을 타고난 사업가였고, 열정적인 리더였으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5명의 자녀를 낳고 기른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는 ‘나는 남을 도울수 있을때 행복하고, 그렇지 않을때 불행하다.’라고 한다.
척 피니는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뿐 아니라 나의 영웅이기도 하다.